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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Korea Forum 뉴스레터] [제3호]고대와 현대, 전쟁과 신탁
작성자 : TI-Korea(ti@ti.or.kr)  작성일 : 2022-04-01   조회수 : 1196

   2022.4.1 제3호

 

 

 

고대와 현대, 전쟁과 신탁

 

 

하종관 법무법인 유준 변호사

 

서에서 동으로 스페인과 터키, 남에서 북으로는 리비아와 마케도니아까지 펼쳐져 있었던 고대 그리스 세계. 도시국가 델포이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중앙에 위치하여 있었다. 하지만 델포이는 그 위치보다 그리스 문명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의 중심지로서 더욱 많이 알려져 있다. 바로 델포이에서 이루어졌던 신탁 때문이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는 고대 그리스의 시민과 통치자들이 모여들어 저마다 보물을 바치고 일상생활부터 국가의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명운에 대한 신의 대답을 구했다. 신전의 여사제는 사람들이 지닌 모든 물음에 대한 아폴론 신의 조언을 전해주었다. 이처럼, 신탁(神託)은 신이 사람을 매개자로 그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포이의 여사제가 전하는 아폴론 신의 말을 듣고, 이를 해석하고 논의하며 자신들의 운명을 선택했다. 신탁은 때로는 전쟁에서 승리를 불러오는 강력한 무기였으며, 때로는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계책이 되었다.

 

실제, 델포이 신탁에 의해 역사가 뒤바뀐 사례 중 하나가 바로 페르시아 전쟁이다.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그리스 전역에 패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아테네 시민들은 델포이에 신탁을 구해 분열을 멈추고 의견을 통합하였다. 그들은 아테네를 버린 채 바다에서 페르시아 대군과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였고 기적처럼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페르시아를 패퇴시키고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맹주로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델포이 신탁이 전쟁으로 나라의 운명을 바꾼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소아시아를 지배하던 리디아 왕국의 크로이소스왕은 당시 부상하고 있던 페르시아를 공격할지 여부를 델포이 신전에 물었고, 여사제로부터 왕이 만약 페르시아로 진격한다면, 강력한 제국 하나가 사라질 것이다.”라는 대답을 듣고 기뻐서 페르시아를 침공했다가 도리어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리디아인들이 신탁의 잘못을 추궁하며 델포이에 사절을 보냈지만, 델포이의 신탁은 정확했으며 단지 사라진 제국이 페르시아가 아닌 리디아왕국이었을 뿐이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신탁은 전쟁과 정치,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고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시계를 지금으로 돌려, 고대 그리스와는 달리 서에서 동으로, 남에서 북으로 지구 전체를 경계로 하는 현대는 이른바 글로벌 세계. 정보, 자본, 인재, 물류는 시간, 국경, 거리도 뛰어넘어 세계 어디로든 이동한다. 이제는 모든 곳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 문명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또 신탁이다. , 여기서의 신탁(信託)이란, 일정한 목적에 따라 특정한 자산을 이전하고 그 재산의 관리와 처분을 남에게 맡기는 법률관계를 의미한다. 과연 현대의 신탁(信託)이 어떻게 고대의 신탁(神託)처럼 운명과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지 살펴보자.

 

20222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냉전이 종식된 뒤 전 세계 국가들은 체제에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 교류하고 거래하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따라서, 테러단체나 반군이 아닌 국가가 다른 국가를 상대로 인명을 살상하는 전쟁이 21세기에 발발하였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비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 비해 군사력이 열위인 우크라이나는 주요 도시와 시설이 파괴되고 민간인 피해 소식마저 끊이지 않고 있다.

 

가공할 러시아 무기의 화력에 절망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나선 21세기의 지원군은, NATO, UN, 미군이 아니라 바로 국제사회의 러시아에 대한 경제 및 금융제재였다.

 

미국과 유럽을 위시한 국제사회는, 러시아 정재계와 군수뇌부의 자산동결, 제재리스트에 등재된 러시아인의 비자발급 제한, 러시아산 원유, 천연가스 수입금지, 러시아 기업에의 투자금지, 첨단기술제품의 러시아 수출 통제와 같은 조치를 취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중앙은행의 자산을 동결하고, 러시아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배제하였다. 이로써, 러시아 정부는 보유하고 있던 해외자산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고, 러시아 기업과 개인은 해외송금과 해외결제라는 단순한 금융거래마저 불가능하게 고립되고 말았다. 루블화는 순식간에 45% 넘게 폭락하였고, 고금리, 고물가가 러시아 국민들의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것은 물론, 러시아의 국가신용등급이 정크 수준으로 추락해 디폴트 상황에까지 내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처럼 강력한 경제 및 금융제재에도 견디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러시아 정재계 인사들과 기업들이 해외신탁에 은닉해 놓은 20조달러(2400조원) 상당의 막대한 자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견해다.

 

마치 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inancial Action Task Force, 이하 ‘FATF’)2022. 3. 4. 총회에서, 법인과 신탁의 실소유자 관련 정확한 최신 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FATF 국제기준과 주석서를 개정하였다. , 각국의 당국이나 기관이 실소유자 정보를 보유하거나 대체방안을 확보하고, 외국법인에 대한 자금세탁 등 위험을 평가하고 완화할 의무를 부과하며, 무기명 주식의 발행금지 및 기존의 무기명 주식과 실질주주(이사)/명의주주(이사)간 약정에 대한 공개를 요구하는 한층 강화된 자금세탁방지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나아가, FATF는 국제사회의 제재를 피해 러시아 부호들이 자산을 이전하고 있다는 아랍에미리트를 강화된 관찰 대상 국가로 발빠르게 추가하였다.

 

만일,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해외법인이나 신탁의 실소유자를 확인할 수 있다면, 특히 그 실소유자가 러시아 정·재계 인사와 군부, 또는 러시아 정부와 관련된 기업임을 파악할 수 있다면, 국제사회는 해당 법인과 신탁에 대해서도 제재를 부과할 수 있게 되고 러시아는 더이상 전쟁을 계속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현대의 신탁은 국제사회의 협력과 제재를 통해 신탁의 투명성을 확보한다면 고대의 신탁과 같이 전쟁에서 승리를 불러오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고, 전쟁과 정치,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신탁(神託)이 인간에게 신의 대답을 바르게 해석하라는 과제를 내어 주었던 것처럼, 현대의 신탁(信託) 역시 러시아가 전쟁을 포기하게 하려면 비단 러시아만이 아니라 러시아를 제재하려는 국가를 포함해 법인과 신탁 뒤에 숨어 있는 모든 자금세탁행위를 공개하고 추적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 현대의 국제질서는 법에 의한 지배에 기반하는데, 일부 부패한 사람들에 의해 법인이나 신탁을 불법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행위가 계속해서 용인된다면 이는 역사의 소중한 자산인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깨트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점에서 더욱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현대 세계가 신탁(信託)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그리하여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될지, 페르시아에 멸망한 리디아가 될지를 결정하고 책임질 몫은 지금 바로 여기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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